이제 방글라데시 국립박물관에 대한 마지막 포스트입니다.
포스팅중 직접찍은 전시물사진중에 극도로 잔인한 사진이 있으니,
노약자 및 임산부에게는 포스팅 열람을 권하지 않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어느 박물관을 가든, 자국의 내노라 할 만한 인물을 반드시 전시합니다.
방글라데시의 경우 우리나라에 '동방의 등불' 이라는 시를 헌정했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를 기치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타고르는 1931년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신 분이시죠.
타고르는 1861년도 지금의 인도 켈커타에서 태어났습니다.
지역적으로는 서벵골이라고 불리우는 곳이죠.
사실 행정구역상 인도이긴 하지만, 당시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터라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은 하나의 나라였습니다.
서벵골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히 벵골어를 사용하였고,
이후 독립후 방글라데시와 인도의 국가를 직접지었다고 하네요.
벵골어에 지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에겐
타고르는 그야말로 자국의 영웅이나 다름없는 것이죠.
물론 엄밀히 따져서 타고르의 국적은 인도가 맞는것 같긴합니다만.
1952년에 있었던 벵골어 지키기 운동.
1947년 인도로부터 독립한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은
서파키스탄위주의 정책과 동파키스탄에 대한 차별대우로, 점점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는데,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인종, 문화, 언어 모든면에서 전혀 달랐습니다.)
서파키스탄이 일방적으로 동파키스탄에 벵골어를 버리고 서파키스탄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벵골어를 지키기 위한 운동이 지금의 방글라데시 수도의 대학인 다카대학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자. 지금부터는 1971년도에 있었던 파키스탄-방글라데시 전쟁에 대한 전시입니다.
사실 엄밀히 말해, 서파키스탄의 동파키스탄 탄압 및 학살에 대한 포스팅이 될거 같네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대공간에 상당히 많은 분량의 전시를 차지하는
방글라데시 독립항쟁에 대한 부분입니다.
파키스탄이 정말 방글라데시에 몸쓸짓을 많이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방글라데시의 국기에 대해 살펴보죠.
방글라데시 국기는 붉은 동그라미와 초록색 배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치 일본 국기와 비슷하죠.
일각에서는 1971년도 방글라데시가 독립을 이루는 즈음에
일본의 많은 지원이 있어서 국기또한 일본의 영향을 받은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가지기도 합니다.
(사실 일본은 방글라데시를 후방지원하여, 많은 경제적 득을 취했습니다.)
초록색은 방글라데시의 녹지를 의미하고, 붉은색은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흘린 피라고 합니다.
방글라데시 전도입니다.
바다와 맞물려 있는 곳은 상당히 많은 강들이 있습니다.
수산자원이 풍부할 수밖에 없죠.
파키스탄에 의한 방글라데시 대 학살로
무려 750만명의 방글라데시인이 사망 혹은 고문 투옥당했습니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파키스탄 사람들을에 대해 극도의 협오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경은 이렇습니다.
힌두교 인도로부터 독립한 이슬람국가인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은
종교를 제외하고 모든면에서 전혀 달랐고
심지어 지리적으로도 인도에 의하 영토가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선거에서 대부분의 요직에 서파키스탄인이 대거 포진하면서,
예산또한 서파키스탄 중심으로 편성되는등, 모든부분에서
동파키스탄은 홀대를 받게 됩니다.
1970년 민정이양 총선에서 동파키스탄의 완전한 자치 확대를
주장했던 아와미 연맹이 동파키스탄 지역 선거구를 거의
석권해 총 의석 313석 가운데 160석, 과반의석을 획득하는 압승을 거두지만,
서파키스탄 출신의 아히야 칸 대통령은 총선결과를 무효처리했고, 이에
동파키스탄 전역에서는 아히야 칸 정부의 총선 무효화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와
소요사태가 번졌습니다.
1971년 동파키스탄의 라만당수는 동파키스탄 최대 도시인
다카에서 벵골인의 나라를 국호로 삼아 방글라데시의 일방적 독립을 선언하고
이에 놀란 파키스탄군은 라만 당수를 즉시 체포, 서파키스탄으로 압송합니다.
이에 그간 쌓여있던 감정이 폭발해 수많은 동파키스탄 사람들이 무장을 하고
묵티 바히니라는 독립군을 결성, 동파키스탄 주둔 서파키스탄 군인과 관리를
무차별 사살, 학살했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서파키스탄은 군대를 보내 동파키스탄으로 보내면서,
서파키스탄에 의한 동파키스탄에 대한 일방적 학살이 시작됩니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당시 서파키스탄의 아히야 칸 대통령을 악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있을수 없는 민간인, 그것도 아이들까지 무참히 살해하고
시체를 개들이 먹고 있는 사진입니다.
1971년 3월 25일 아무런 무장도 없는 민간인의 주택에 들어간 파키스탄군은
잠자고 있던 민간인들을 무참히 살해합니다.
역시 같은날 살해당한 방글라데시 민간인
살해후 안구를 도려내었습니다.
많은 죄없는 방글라데시 민간인들이 살해당했습니다.
잠자다 무참히 살해당한 방글라데시 사람들
묵티 바하니 독립군은 전세가 밀리자 근거지를 인도 접경지역 켈커타주로 옮겨
항쟁을 이어나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인도가 참전하게 됩니다.
서파키스탄과 앙숙이었던 인도는 압도적인 전력으로 파키스탄에 큰 타격을 가했고
이에 파키스탄은 1971년 12월에 인도에 항복하게 됩니다.
동쪽에서의 전쟁 종식소식 - 워싱턴포스트
이게 결론은 인도-파키스탄이 서로 화해한 것으로 결론이 나고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한 내용은 별로 화두가 되지 않네요
서파키스탄에 의해 학살당한 방글라데시인들의 시체를 자국인들이 끌고 다니도록 했습니다.
한국인으로써 일본인의 잔악함에 치를 떨었지만,
지구 어디를 가든 전쟁의 상황에서는 누구나 똑같이 된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네요
수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지금의 국가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그림
계속 잔인한 사진들입니다.
도저히 찍지 못했던 사진들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전쟁에서든 발생하는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여자들의 사진들도
많았지만, 도저히 사진을 찍을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죽이고 훼손하고 불에 태우고
사람의 잔인함은 정말 무시무시합니다.
방글라데시인들을 무참히 짓밟는 파키스탄 군인
파키스탄의 건국의 아버지인, 방가반두쉐이크무집
1971년 12월에 독립이 선언된 후
쉐이크무집이 집권한후에도 파키스탄에서는
교묘하게 대통령 일가와 관련된 사람들을 암살했습니다.
대부분의 측근들이 사망했음을 보여줍니다.
전시관 내부를 둘러보면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똑같이 비슷한 상황을 겪어 남의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죠.
반세기동안 일제의 학대를 당하고 또 민족간의 전쟁을 겪은 우리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아마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당했던 많은 공개되지 않았거나 찍히지 않은 사진들을
다 공개한다면, 아마 우리는 일본을 영원히 용서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더 중요한건, 특정국가나 민족에게 벌어졌던 일들이 그 나라의 문제만이 아니라,
온 인류중 누구가 가해자가 될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조금 잘살게 되었다고, 후진국들에게 막말하고 똑같이 천대하는
한국의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도
어찌보면 파키스탄인이나 일본인처럼 똑같은
가해유저자를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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